[1] 박희도 감리교 목사 - 3. 1 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중 1인이었다가 변절

친일잡지 [동양지광]을 창간하면서창간사에 쓴 글
- 이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속에 일본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박희도 목사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독재자 이승만에 의하여 구명.

[2] 정춘수 감리교 목사 - 3. 1 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중 1인이었다가 변절

1) 1940. 10. 감리교 교권을 장악한 후 [감리교 혁신안] 발표 내용 중
   -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왜군)에 다수 참가하게 할것 - 까지 규정
2) 1941. 10. 10.에는 교역자와 신도대표 50여명을 이끌고 [부여신궁] 조영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3) 1941. 10. 21.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뜯어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 실천케 하였다.
4) 1942. 2. 13. 감리교 각 교구장에게 공문을 보내어, "교회 종도 헌납하야 성전(왜놈제국주의 2차대전) 완수에 협력 할 것" 을 요구.
5) 1944년 감리교단을 이끌면서, 상동교회에 [황도문화회관]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에게 일본정신 주입에 광분
6) 머리 이마빡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교인을 인솔하여 남산의 조선신궁(왜놈신사)까지 뛰어가 단체로 신사참배 강행 !
(대부분의 사람들은여기에서 입을 벌린채 할 말을 잊게 된다. X팔 !)
7) 해방 후 낯짝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1949. 10월 어느날 명동성당의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삶을 마치다.
8) 역사 왜곡으로 고항인 청주 [3. 1 공원] 에 세워졌던 민족반역자 정춘수의 동상은 역사왜곡을 뒤늦게 알게 된 시민단체들에 의하여 1993년 2월에쓰러트려 지고야 말았다. (더러운 X끼)

[3] 정인과 장로교 목사 - 상해 임시정부 외무차장이었다가 귀국후 변절

1) 장로교 총간사로 취임하여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왜놈)으로서 협심육력 동아질서의건설에 용왕매진" 하자고 선동하면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선도
2) 교회의 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것과, 전 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이론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 개정을 지시
3) 1941. 9. 4.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
- 앞으로 일보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
4) 1942. 4. 29. 발표한 글 중의 일부 -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일본어) 생활의 철저 -
5) 해방 후 친일행각 죄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 되었다가 이승만에 의한 반민특위 폭력 해산으로 구명도생

[4] 전필순 혁신교단 목사 - 항일단체 [대동단] 단원이었다가 변절

1) 중일전쟁시 전국 각지 교회 순회강연시 "정의의 중일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 조선인은 전쟁에 헙럭하라 !" 고 선동
2) 기독교를 총 망라한 혁신교단을 조직하여 그 괴수가 되어 친일 부역
3) 교회 건물 내에 일본 [가미다나]를 설치할 것과 [황도연구회] 설립선동
4)해방 후 친일행각 죄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 되었다가 이승만에 의한 반민특위 폭력 해산으로 구명도생

[5] 김길창 목사 -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으로 친일부역한 거물 기독교 지도자

1) 기독교인 황민화운동을 이끈 수뇌 인물
2)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 말살운동 등에 광분
3)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와 교인을 왜놈경찰에 밀고 탄압케 함.
4) [3. 1 운동]을 "쓸데 없이 딴 장난 하다가 실패하였다" 라고 비난.
5)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됨 - - - (이하 생략)

[6] 노기남 천주교 대주교 - 호교(護敎)를 위해 신을 판 성직자

1) 1936. 5. 18. 로마교황청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린다. (하여간 왜놈들의 로비 능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 교황청까지도 헤까닥하게 만들었으니) 이에 노기남은 드디어 친일행각의 길로 나선다.
2) 로마교황청 훈령에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노기남은 자신은 물론 신자들에게도 신사참배를 허락 하였다.
3) 그리하여 노기남은 천주교 단체의 책임자로서 매월 1일마다 소속 단원을 인솔하여 남산 조선신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친일 부역행위를자행하였다.
4) 경성교구 40여 성당을 순회하며 시국강론시 선동한 중요 친일 내용
- 매일아침 황실태안, 황군의 무운장구 기도
- 매일저녁 전쟁에 부상, 전사한 황군 장병을 위하여 기도
- 매주 황군 무운장구를 위하여 미사 성제 거행
- 매월 황국신민의 각오를 일층 굳세게 하기 위한 기원제례와 설교
- 신자의 일상생활 검소화로 저축에 힘써 국방헌금(왜군) 헌납
5) 일본군용기 헌납운동 주도 - 매월 1인 1전 헌금과 유지의 기부금 선동하여 일본전투기 제작대금 1만원을 왜국 천황폐하에게 헌납
6) 기타 친일행적은 시간과 지면관계상 더 이상 - - - (엣퉤퉤 ! )

[7] 한일합방 이전 [조선천주교] 책임신부였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

- 천주교인인 안중근 의사께서 이등박문에게 천벌을 내리시고 체포되시자 왜놈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안중근 의사를[살인범]으로 매도 하면서 파문에 처하여 잽싸게 일제에 아부하다.
- 안의사께서 사형집행 전에 [본당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고 싶다]라는 요청을 하시었으나, [암살자가 가톨릭 신자일 수 없다] 라고 거절하며 계속하여 일제에 아부하다.
- 그리하여 안의사께서는 일제시대 내내 천주교로부터 [살인범]으로 단죄되었고, 해방 후에도 계속하여 방치되시었다.
- 그러다가 천주교에서는 여론에 마지못하여 1993. 8. 21. 복권 조치를 행하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편찬 [친일파 99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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