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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사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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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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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종교는 이익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종교적 정신병학 교수들은 수백만 명이 보는 칼럼에서, 베스트셀러에서, 매주 전국 방방 곡곡으로 퍼져나가는 라디오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신앙의 축복을 찬양해 왔다.
당적을 막론하고 정치인들도, 지난 날 공적을 다투기 전까진 전혀 신앙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기는 교회에 충실히 나간다고 주장하면서 박식한 강연을 할 때 마다 하나님을 들먹인다. 우수한 몇몇 대학 강의실을 제외하면 이 문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얘기를 언급조차 하기 힘들다.

2. 기독교가 과연 유순한가?
종교인들의 침해 행위 들에 대해 지금까지 별 다른 반대 여론이 일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유순하고 관대하다. 박해는 과거 지사라고 보는 시각이 널리 퍼진것이 그 한 원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물론 종교계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유와 관용의 진정한 옹호자들도 많고, 더 나가아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을 굳게 믿는 이들도 많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할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박해를 가하고자 할 것이고 그것이 가능할 경우 기꺼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다.

3. 환경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종교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거대 종교들 - 불교, 힌두교, 회고, 기독교, 공산주의 까지 - 에 대해 진실이 아닌데다가 해로운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종교들이 서로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중 하나 이상이 옳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종교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종교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가는 환경의 영향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4. 신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스칼라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리적 근거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기타 그와 유사한 흐름들이 나오면서 많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전통적 주장들이 호소하는 논리는 낡아빠진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로서 지금은 사실항 카톨릭계 논리가들외에는 어떤 논리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논리적이지 못한 이러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목적론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다윈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논리적 설득력은 차치하고라도,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성이란 것이, 무생명의 성운으로서 수백만 년 동안 준비한 끝에 고작 히틀러나 스탈린, 수소폭탄의 출현이라는 것으로 적절하게 보상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윤리가치를 나로선 기이하게 생각한다.

신이 만든 세상에서 발생한 수 없이 많은 불행한 일들은 대개 인간의 교만스러운 자유의지의 결과로 매도된다. 인간이 교만을 품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인가? 악마의 세력이 인간의 허영심을 부추긴 결과라고 말하면 결국 신은 무기력했던 것이며, 무기력하지 않다고 옹호하려면 신은 애초부터 자비심 같은 것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행동 결과를 가지고 심판할 준비만 하고 있는 신에게 무슨 자비심이 있다고 할 것인가?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틀림없이 자신의 유희를 위해 세상을 창조한 것이 분명하다.

5. 종교가 교육에 주는 해악
종교가 주는 해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에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믿음의 성질에 좌우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어지고 있는 특정 신조들에 좌우되는 것이다. 우선 믿음의 성질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서는, 신앙을 갖는 것, 다시 말해 반대 증거가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반대 증거로 인해 의심이 생기면 그 증거들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된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러시아의 경우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미국의 경우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젊은이들의 귀를 막아버린다. 그 결과 양측의 신념이 원상 그대로 보존되면서 사생 결단식의 전쟁만 준비될 뿐이다.

비록 자유로운 탐구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라 할지라도 이것 혹은 저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확신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바로 이것이 국가 교육 제도를 자극해댄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자신들과 다른 광신주의를 가진 상대편에 대해 광적인 적대감으로 가득 차게 되면, 특히 모든 종류의 광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더 한층 적의를 가지게 된다.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 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러한 습관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되어 있으며, 근거 없는 독단 체계를 믿지 않겠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2세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형편이다.

6. 신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내게 가르치셨다. '누가 날 만들었는가?'라는 물음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단순한 구절이 내게 제일 원인론의 오류를 보여주었다. 모든것이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도 하나님처럼 원인 없이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므로 이 이론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없다.
이 논리는, 세계는 코끼리 위에 놓여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다고 보는 힌두교도들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럼 그 거북이는?'하고 물었더니 그 인도인은 '우리 주제를 바꿔보는게 어떻소?'라고 대답했다. 원인이 없다면 세상은 생겨나지 못했다고 볼 이유도 없지만 반대로 세상에 항시 그렇게 존재해 있었다고 해서 안될 이유도 없다. '세상은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물에는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야 말고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에 다름아니다.

7. 자연법칙을 제정하고 부여하는 자는 존재하는가?
자연법칙들의 존재는 결국 법칙 부여자를 함축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인간의 법칙은 여러분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하는 명령으로서, 여러분은 그대로 행동할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법칙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기술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실제 움직임을 기술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순간 곧 다음의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그러한 자연법칙들만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만약에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결국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뜻이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법칙의 일관성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만일 상당수 정통신학자들이 주장하듯, 하나님은 모든 법칙을 만듦에 있어 다른 법칙이 아닌 바로 그것들을 만들게 된 이유 - 물론 최선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하겠지만 실상을 보라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 가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만든 법칙들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면, 하나님 자신도 어떤 법칙에 따랐다는 얘기가 되므로 하나님을 중재자로 끌어들여 봤자 아무런 유리할 것도 없게 된다. 결국 법칙은 신성한 칙령 외부에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한다는 얘기가 되므로 하나님은 별 소용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최종적인 법칙 부여자가 아닌 셈이니까. 한마디로, 자연법칙에 관한 이러한 이론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한다.

8. 만물과 세상사가 다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여러분도 다 아는 얘기겠지만, 세상만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꼭 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이 상태에서 조금만 달라진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목적론이다. 이것은 때로 기묘한 형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끼의 꼬리가 흰 것은 총 소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목적론을 응용한 이 같은 해석을 토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의심스럽다. 패러디하기 딱 좋은 이론이다. ‘코는 안경 쓰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졌음에 분명하다’고 하는 볼테르의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류의 패러디는 18세기에는 엉뚱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각자의 주위 환경에 적합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보다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적응의 기본 원리이다.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전혀 없다.
이 목적론을 살펴보노라면, 온갖 결함들을 지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정말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생각해 보라. 만일 여러분에게 전지전능과 수백만 년의 세월을 주면서 세상을 완성시켜 보라고 했다면 고작 공포의 KKK단이나 파시스트 같은 것밖에 만들 수 없을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중에서]

9. 옳고 그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기존의 신존재증명 이론을 폐기하였지만 새로운 도덕적 논변을 창안했고, 그 이론은 다양하게 형태를 바꿔가며 19세기 내내 큰 호응을 받았다. 그의 도덕적 논변에는 온갖 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옳고 그름 사이에 실제로 차이가 있든 없든 나로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사는, 옳고 그름에 차이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곧바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 그 차이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생기는 거라면 하나님 자신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에게는 선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아무 뜻 없는 말이 되고 만다. 만일 여러분들이 신학자들처럼 하나님은 선하다고 말하려면,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옳고 그름을 만들었다는 자명한 사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은 선이며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 논리적으로 하나님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각자의 기호에 따라 보다 우월한 신이 있어 이 세계를 만든 하나님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라 해도 좋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는 사실 신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악마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일부 그노시스트들의 노선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가 대단히 그럴싸한 견해라고 종종 생각해보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할 말들이 많을 것이고 나는 이것을 논박하는데 별 관심이 없다.

10. 세상의 불의는 누가 만들었는가?
도덕론의 아주 기이한 형태가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 한편에는 너무도 큰 불의가 존재한다. 그리고 선한 자들이 고통받는 일도 많고 악한 자들이 융성하는 일도 많아서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괴로운 일인지조차 분간이 안 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서는 이 지구상 삶의 불균형을 바로잡아 주는 내세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긴 안목에서 결국 정의가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은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논리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를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세상 밖에 모른다. 우주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률에만 입각해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우주 전체의 평균적 표본일 것이고 그러니 여기에 불의가 존재한다면 다른 곳들에도 역시 불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오렌지 상자를 하나 받아서 열어보았다고 가정해보자. 맨 윗줄 오렌지들이 모조리 상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그 밑의 것들은 분명히 싱싱할 것이다. 그래야 불균형이 바로잡히니까.’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상자 전체를 상한 것들로만 채워 보냈겠군.’이라고 말할 것인데, 과학적인 사람이 우주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의를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에 근거하는 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도덕론이 아닌 부인하는 도덕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적 이론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

11. 예수님 말씀 중 기독교인에게 인기가 없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예수의 가르침이 있는데, 내가 볼 땐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부 우리의 기독교인 친구들 사이에선 크게 인기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바로, ‘네가 완벽해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대단히 뛰어난 가르침이지만 말한 바와 같이, 그다지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 이 모든 좋은 말씀들은 다 좋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면서 행하기는 다소 어렵다. 당장 나부터도 그 말씀들에 따라 산다고 공언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결국 다 그렇다 해도 기독교인은 경우가 한참 다르다.

12. 예수의 도덕적 결함
내가 볼 때 예수의 성격에는 대단히 중대한 결함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즉, 그가 지옥을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든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복음서에 그려진 대로라면 예수는 분명히 영원한 형벌을 믿었으며, 자신의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보복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대목이 수차례 발견된다. 이러한 태도는 평범한 설교자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것도 아니지만 훌륭한 존재가 그런다는 것은 어쩐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우 부드럽고 점잖았음을 보게 되는데 내 생각에도 격분하는 것보다는 그 쪽이 훨씬 더 성자다운 태도가 아닐까 싶다.

13. 기독교의 잔인성이 발현되는 때
사람들은 정서적 이유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는 사람을 덕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도 그런 얘길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사악해질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극악했다. 여러분은 이 기묘한 사실, 즉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도 더 악화되었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나 기독교를 철저히 믿었던 소위 신앙의 시대에는 고문기구를 갖춘 종교재판소가 존재했으며, 수백만의 불운한 여인들이 마녀로 몰려 불태워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잔인한 폭력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것이다.

14. 진솔하게 세계를 마주 대해야 할 이유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 이는 자유인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개념인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끔찍한 죄인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경멸감마저 든다. 우리는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하게 직시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바라던 만큼 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온 세상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지식과 온정과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 혹은 오래 전에 무식한 사람들이 뱉어 놓은 말들로 자유로운 지성에 족쇄를 채우는 짓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15. 종교는 권력을 지향한다.
오늘날에는 ‘종교’라는 말이 대단히 느슨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극단적인 신교의 영향하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도덕이나 우주의 본질에 대한 개인의 어떤 진지한 확신을 의미하는 말로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종교를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반역사적인 행위이다. 종교는 일차적으로 사회현상의 하나다. 교회가 처음 생겨난 데는 개인적으로 굳은 확신을 지닌 스승들의 힘이 컸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교회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교회는 집단들 속에서 번성하면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서구 문명에 속한 사람들에게 최고 관심사가 되고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인들의 윤리와 엄청나게 큰 거리를 유지해왔다. 사회적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교회이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들이 사회적 세력으로서의 기독교를 판단하려 한다면 복음서들을 재료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처럼 교회와 창시자 사이에 이견이 생기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말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진리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점에 있어 다른 특권층보다 더 질이 나쁘다. 과거에 단 한 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계시되었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 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16. 기독교 최악의 특징
기독교의 특징 가운데 최악의 것은 뭐니뭐니해도 성(性)에 대한 태도다.
이것은 너무도 병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태도여서 로마 제국이 몰락해 가던 당시 문명세계가 앓았던 질병과 연결해 생각해야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기독교가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는 취지의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엄청난 착오 중의 하나다.

교회는 결혼을 파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사랑의 기교’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배격함으로써, 아주 적은 쾌락과 아주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형태의 성만이 허용되어지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산아 제한에 반대하는 것도 알고 보면 같은 동기에서 나왔다. 즉, 여성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해마다 아이를 낳게 되면 결혼 생활에서 많은 쾌락을 얻어내지 못할 거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로선 산아 제한을 장려할 이유가 없다.

17. 매독과 에이즈
기독교 윤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죄악의 개념은 사람들에게 자학의 배출구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막대한 해를 미친다. 결국 사람들은 그러한 배출구를 적법하다고, 심지어 숭고하다고까지 믿게 되기 때문이다. 매독 예방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 병은 미리 예방만 하면 걸릴 위험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죄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시각을 견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죄인의 처자식들까지도 벌받게 만들려고 한다.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선천성 매독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 죄인들이 벌받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의 욕구만 없었어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아이들이다. 이러한 악마적 잔인성으로 이어지는 교리가 어떻게 해서 도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질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18. 신의 전능함은 결국 잔인함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엄청난 윤리적 곡해가 수반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 세상은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 하나님은 세상이 안게 될 온갖 고통과 불행을 내다보셨다.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은 고통은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무엇보다도 그 주장 자체가 진실이 아니다. 강물이 범람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그 아이가 장차 살인광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낳는다면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장차 저지르게 될 죄악을 미리 아셨다면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죄악의 모든 결과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고통은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지마 어쨌거나 대단히 빈약한 변론임에 틀림없다. 나는 언제 한 번 누구든 기독교인들을 병원의 아동 병동으로 데려가 볼 생각이다. 거기서 고통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을 똑똑하게 목격하게 한 다음, 이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버려졌으니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예의 그 주장을 계속 해보라고 하고 싶다.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속에서 자비와 동정의 감정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는 한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만큼이나 잔인해지지 않고선 말이다. 고통받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윤리적 가치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항시 고통과 불행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19. 기독교의 기이한 특징
기독교의 출현과 더불어 세상에 퍼진 불관용은 기독교의 가장 기이한 특징의 하나인데 내가 볼 때 그것은 유대인의 정의관과, 유대신만 존재한다는 그들의 배타적 믿음에서 기인한다. 유대인들이 왜 이렇듯 유별난 특성을 갖게 되었는지, 나로선 알진 못한다. 아마도 그들이 예속되어 있던 시절 유대인을 이방민들에 흡수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듯 하다. 이유야 어쨌건, 개인적 정의를 강조하고, 한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라는 관념을 강조하는 풍토의 조성자는 유대인, 특히 유대인 사도들이었다. 이 두 가지 관념은 서양 역사에 엄청나게 끔찍한 영향을 미쳐왔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보다 덜 사나운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기독교 덕택에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전통적 신앙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어온 수세대에 걸친 자유사상가들 덕분이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속의 온유함과 합리주의는 모두 과거 정통 기독교인들로부터 박해받았던 사람들의 가르침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기독교는 참으로 온유하고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우습기까지 하다.

20. 자유의지와 기적의 모순
진화론의 개념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인간에 대해 다른 생명체에 대한 설명과는 완전히 틀리게 설명하는 것이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 속의 자유의지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생명물질의 행동을 물리나 화학법칙 용어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해 왔다. 모든 하등 동물은 일종의 기계 장치라고 보는 데카르트의 입장은 더 이상 자유 신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연속성의 교리는 그들로 하여금 한 발 더 나아가, 소위 죽은 물질의 행태조차도 불변의 법칙에 엄격하게 지배받진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게 만든다. 아마도 그들은, 법칙의 지배를 폐기하게 되면 기적의 가능성들도 폐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모양이다. 기적이라는 하나님의 행위는 일반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위반하는 행위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물 그 자체가 기적이므로 특별히 신의 개입을 입증하려고 특정 사건들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깊이 깨달은 듯한 태도로 주장하는 현대 자유 신학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1. 자유의지론이 유효한 경우
형이상학적 문제로서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분명한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성격은 훈련이 가능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늘 믿어왔다. 알콜이나 아편이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모두들 알고 있다. 의지력만 있으면 술에 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은 주장한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이 ‘영국 헌법’을 정신이 말짱할 때처럼 똑똑하게 말할 수 있을 때, 그는 그렇게 주장하지 못한다.

아이를 착하게 하는 데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보다도 적절한 음식이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자유의지론이 실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한 가지 경우는, 사람들이 이러한 상식적 지식을 끝까지 쫓아가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할 때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괴롭히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성가신 행동은 선행된 원인들에서 나온 결과라는 사실과 직면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원인들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가 태어난 시점 이전까지 올라가게 되며 따라서 아무리 상상력을 펼쳐보아도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사건들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22. 신이 지구인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자위적 가정이다
종교가 호소력을 발휘하는 대상은 공포감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종교는 특히 우리 인간의 자존심에 대고 호소한다. 만일 기독교가 진리라면 인류는 보기보다 그렇게 가엾은 벌레들은 아닌 셈이다. 인류는 우주 창조주의 관심의 대상으로서, 행동을 잘 하면 창조주가 수고스럽게도 기뻐해 주시고 잘못 하면 불쾌해 하시니까 이것은 대단한 우대이다.
우리 같았으면, 개미들 중에 어떤 놈이 자기 의무를 다 하는가 가려내려고 개미집을 연구해 볼 생각은 하지도 못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해주시는 거라면 우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며 더욱이 우리들 중에 착한 자에게 천국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상으로 하사한다는 것은 훨씬 더한 우대이다. 다음으로, 우주의 모든 전개는 소위 선이라는 결과,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하는 비교적 현대적인 관념이 있다. 이 관념 역시도 우주는 취미와 편견을 같이 하는 존재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보는 자위적 가정이다.

23. 지식의 위험함
교회의 정의 관념은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지성과 과학을 경시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이 같은 결함은 복음서들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어린 아이들처럼 되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미분이니 통화원칙이니 현대적 질병 퇴치법이니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교회에 따르면 우리의 임무는 이런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교회도 지식 자체를 죄악시하진 않지만 과거 전성시대에는 그랬다. 그러나 지식의 획득을 죄악시하진 않아도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는 건 여전하다. 지식을 갖게 되면 지성의 교만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기독교 교리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열대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열병 퇴치에 애쓰는 사람인데 그렇게 고생하는 동안에 어쩌다가 몇 명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은 게으르고 무능한데도 아내가 지쳐 죽을 때까지 해마다 애를 낳았으며 아이들을 통 돌보지 않아 그 가운데 절반을, 예방만 했으면 무사했을 사고로 죽게 만들긴 했지만 부정한 관계를 맺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착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이들 가운데 두 번째 사람이 첫 번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미신적이고 전적으로 이성에 반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죄를 피하는 것이 명백한 장점보다 중요시되고, 유익한 생활이 되도록 도와주는 지식의 중요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한, 이러한 태도는 불가피한 것이다.

24. 행복은 당당함에 있는 것
종교는 공포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대문에 일정한 류의 공포들에 고귀함을 부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함부로 여기지 못하게 만들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는 인류에게 커다란 해악을 저질렀으니, ‘모든’ 두려움은 나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내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뿐 나의 에고 따위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이 젊지는 않지만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공포로 몸을 떠는 모습에 대해선 경멸한다.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 건 그것에 끝이 있기 때문이며, 사고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제 가치를 잃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당당하게 처신했다.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 진실하게 사고하도록 우리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당함이다. 우리가 아늑한 실내에서 인간화된 전통적 신화들이 주는 온기에 묻혀 있다가 과학이 열어준 창을 내다봤을 때 처음엔 몸이 떨리지만 결국에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힘을 얻게 되며 거대한 우주도 제 나름의 장엄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25. 사랑과 지식
훌륭한 삶에 대한 내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그러므로 어떤 삶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그보다 좀더 나은 삶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지식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지식도 훌륭한 삶을 낳을 수 없다. 중세 시대에는 어떤 지방에 페스트가 돌면 성직자들은 그 곳 주민에게 교회에 모여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 결과, 간청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 사이에 전염병이 엄청난 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지식 없는 사랑의 일례이다. 지난 세계 대전의 경우는 사랑 없는 지식의 표본이 되었다. 어느 경우든 결과는 대규모의 죽음이었다.

사랑과 지식 두 가지 모두 필수적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사랑이 좀더 근본적이다.
사랑은 지성인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방법을 찾아낼 목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적이지 못하면 들은 대로 믿어버리는 태도에 머물게 되어 진실한 자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를 끼치기 쉽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의학일 것이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에게 있어 가장 헌신적인 친구보다도 유용한 존재이며, 의학 지식의 발전은 사회 보전을 위해 무지한 박애 행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발견들로 부자들만 혜택을 받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에도 자비란 요소가 필수적이다.

26. 무한한 자비는 어렵기도 하지만 지겹기도 하다
자비를 널리 확대시키는 것은 좀더 수월한 일이지만 자비에도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숙녀와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다른 사람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 남자가 물러나는 편이 낫다고 보진 않는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공정한 경쟁의 장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경쟁자에 대한 그 남자의 감정이 전적으로 자비로울 수만은 없다. 나는 우리가 여기 지구상의 훌륭한 삶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든 동물적 활기와 동물적 본능이라는 어떤 기초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한 기초가 없는 삶은 무기력하고 재미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그것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것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금욕하는 성자나 초연한 철인은 완성된 인간이 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소수는 사회를 평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마도 지겨워서 죽을 것이다.

27. 도덕의 이상한 기원
현대의 도덕은 공리주의와 미신의 기묘한 혼합물이지만 미신적인 부분이 좀더 강력한 지주가 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도덕 규율의 기원이 바로 미신에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떤 행위들은 신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간주되면서 법률로 금지되었다. 신의 분노는 죄를 지은 개인들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내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이라는 죄의 개념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다. 왜 특정 행위들이 그렇게 불쾌한가에 대해선 아무 이유도 주어질 수 없다. 이를테면 염소 새끼 가죽을 어미의 젖에 넣어 삶는 것이 왜 불쾌한 것으로 여겨졌던가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의 계시가 그러했다고 알려졌었다. 때때로 신의 명령이 이상하게 해석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토요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교도들은 이것을 일요일에는 놀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똑같이 숭고한 권위가 생긴 것은 과거의 것에 대해 새로운 금지가 생겨난 탓으로 돌려진다.

삶에 대해 과학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성서 구절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협박당하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저러한 행위는 죄악이며 그 결말은 이러저러하다.’는 얘기에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해로운 행위인지 혹은 거꾸로, 그것이 죄악이라고 하는 믿음이 해로운 것인지 여부를 따져보고자 할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현재 우리의 성도덕에는, 특히 성문제와 관련해서, 순전히 미신적인 기원을 가진 것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미신이 아즈텍인들의 그것(식인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햇빛이 약해진다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이웃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가지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이 미신은 일소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고관들이 보여준 군사주의에 대한 사랑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 도덕의 수호자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그들은 도덕을, 고통을 가하고픈 자신들의 욕구의 합법적 출구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죄인은 정당한 사냥감이다, 그러니 관용 따윈 필요 없다!

28. 개인주의의 근원
기독교 신앙은 로마제국 시대의 민중들, 즉 자기네 민족 국가들이 멸망하면서 모든 정치권력을 박탈당한 채 광대한 비개성적 집합체 속에 흡수되었던 인구 사이에서 생겨났다. 기독교 시대가 열리고 처음 삼백 년 동안, 기독교를 택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혹은 정치적 제도의 단점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힘이 없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므로 그들이 불완전한 세계에서도 개인은 완전해 질 수 있으며
훌륭한 삶은 이 세상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믿음을 채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9. 개인적 구원에 담긴 결함
정치적으로 예속된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위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개인적 구원이라는 관념은 우리가 극히 협소한 훌륭한 삶 개념에서 벗어나는 순간 불가능해진다. 정통 기독교적 개념의 훌륭한 삶은 덕있는 생활인데 이때 덕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뜻은 양심의 목소리를 통해 각 개인에게 드러난다. 이러한 관념은 인간을 외계적 압제에 종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훌륭한 삶에는 덕 외에도 이를테면 지성 같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또한 양심이란 것은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도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흔히 어릴 때 들은 훈계의 어렴풋한 기억들로 이루어지므로 훈계를 맡았던 보모나 어머니 이상 현명할 수는 결코 없다. 완벽한 의미에서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교육, 친구, 사랑, 자녀(본인이 자녀를 원할 경우), 궁핍과 큰 근심을 막아줄 충분한 수입, 건강,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직업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여러 다양한 수준으로 그 사회에 의존하며 정치적 사건들에 의해 도움을 받거나 방해받기도 한다. 따라서 훌륭한 삶은 훌륭한 사회에서 가능하며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는 완벽하게 훌륭한 삶이 되기 어렵다.

30. 서구가 “타락”한 이유
구원의 또 다른 성격은 그것이 성 바울의 개종과 같은 격변의 결과로써 생겨난다는 것이다.
셀리의 시에는 이러한 관념을 사회에 적용했을 때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모든 이들이 개종했을 때 그 순간이 온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훨훨 날고 ‘세계의 위대한 시대’가 새로이 시작된다.

시인은 중요한 사람이 못되므로 그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혁명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정확히 셸리와 같은 생각을 가졌으리라 느꼈다. 그들은 불행함과 잔인함은 전제 정치나 성직자나 자본가나 독일인들 때문이며 그러한 악의 근원들이 전복되어질 때 총체적인 심정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 후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게 된다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믿음을 펴기 위해 그들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을 기꺼이 치러오고 있다. 패배나 죽음을 당한 자들은 비교적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빠 승리자로 등장한 자들은 자신들의 찬란했던 희망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탓에 냉소주의와 좌절감에 빠졌다. 이러한 희망들의 궁극적인 원인은 구원으로 가는 길로서의 대단원적인 개종이라는 기독교 교리였다.

31. 지적 설계론에 의한 영혼존재설의 헛점
영생에 대한 믿음을 조장하는 또 다른 감정은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감탄이다.

“사람의 지력은 앞서 등장한 모든 것을 능가하는 정교한 도구이다. 왜냐하면 그는 옳고 그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을 수도 있고 비행기를 만들고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가 죽는다고 해서 완전히 사멸할 수 있겠는가? 이 비길데 없는 도구인 그의 지력이 생명이 멈춘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겠는가?”

버밍엄의 주교가 한 얘기이다.
주교는 계속해서, ‘우주는 지적 목적에 의해 빚어지고 다스려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나서 사멸시킨다면
지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주장에 대해선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도덕적 가치나 미적 가치를 강요할 경우, 이것은 언제나 발견에 장애가 되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의 생각들은 어떠했던가. 가장 완전한 곡선은 원이니까 천체들도 원운동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것만, 즉 더 나아질 필요가 없는 것만 창조했을 것이므로 종은 불변일 것이다. 역병은 죄에 대한 벌로 보내진 것이므로 회개나 해야지 병과 맞서 싸우려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등등...... 그러나 우리가 발견한 바로는 자연은 인간의 가치와 무관하며 따라서 우리의 선악 관념을 무시할 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주에도 목적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목적이 인간의 목적과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볼 근거는 우리가 아는 바로는 전혀 없다.

32. 옳고 그름과 영생
인간은 옳고 그름을 안다’고 반스 박사(주교)는 말한다. 그러나 인류학이 보여 주듯, 인류는 옳고 그름에 대한 관점은 변하지 않은 조항이 단 한 가지도 없을 정도로 끝없이 변화해왔다. 그러므로 인간이 옳고 그름을 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일부 인간들이나 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니체는 예수의 윤리와는 아주 다른 윤리를 옹호했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강력한 정부도 몇몇 있었다.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이 영생론의 논거가 될 수 있다면 우리로선 먼저, 예수를 믿을 것인가 니체를 믿을 것인가 부터 결정해야 하며, 기독교인들은 영생하지만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그렇지 않다 혹은 그 반대다 따위 얘기는 그 다음에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결정은 분명, 서재가 아닌 싸움터에서 내려질 것이다. 결국 최고 성능의 독가스를 보유한 자들이 미래의 윤리를 장악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영생하는 자들일 것이다.

33. 세상은 목적이 없다
도덕적 열정에 고무된 행위들의 그 긴 역사를 생각해 보라. 산 사람을 제물로 삼고, 이단자를 박해하며, 마녀 사냥을 감행하고, 유대인을 학살하고 하더니, 마침내 독가스에 의한 대량박멸에까지 이르렀다. 반스 박사의 동료 감독들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이런 것들에 찬성하고 있으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은 평화주의를 반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니까.

이같은 혐오스러운 행위들과 그들을 자극하는 윤리론들이 과연 지적인 창조주의 증거일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이런 짓을 한 사람들이 영원히 살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혼돈과 우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 세상이 세심한 목적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 목적은 아마도 악마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우연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덜 고통스러우며 보다 그럴 듯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34. 하나님은 뭐하고 계실까?
내가 논하고 싶은 것은 철학의 진실성이 아니라 철학의 정서적 가치일 뿐이므로 현상과 실체 사이의 차이를 근거로 후자를 무시간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이 있다고 가정하고 들어갈 것이다. 어떤 종류든 이러한 형이상학의 원리는 한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천국에 계시니, 세상 일은 모두 잘못이로다.’ 이것이 이 원리의 최후 결론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하나님은 자신의 천국에 있고 또 언제나 거기에 있어 왔으니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까지 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철학가들의 이 신념에 보답이라도 하기 위해- 언젠가는 이 땅에 강림할 것이란 뜻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하늘에만 머물기로 한 것을 보면 이 땅의 일에 대해선 냉정하기로 작정한 듯 하니 우리가 여기에 희망을 건다는 것은 경솔한 일일 것이다.

35. 천국의 실체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간과 결부되어 있으며 시간을 초월한 경험이란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언젠가는 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모순에 빠지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철학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경험은 우리가 아는 경험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은데 만일 이것이 나쁘게 보인다면 현상과 구별되는 실체에 관한 그 어떤 이론도 우리에게 더 나은 희망을 줄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절망적인 이원론에 빠져버린다. 한편에는 우리가 아는 세계, 즉 기쁘거나 불쾌한 온갖 사건들과 죽음과 실패와 재앙들로 가득한 세계가 있으며, 한편으로는 상상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 상상의 세계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달리 없는 관계로 우리가 실체를 확대시킴으로써 실체의 세계라고 명명한 세계이다.

그러나 이 실체의 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실체란 것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36.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종교
새로운 지식은 경제적,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의 시대를 어렵게도 하지만 재미있게도 만든다. 옛날의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어 있었다. 즉, 기후나 풍작에 관련해서는 무생물인 자연의 지배를 받았고, 번식과 투쟁으로 이끄는 인간의 맹목적 충동과 관련해서는 인간 본성의 지배를 받았다. 종교는 여기에서 생겨난 무력감을 이용하여 공포를 의무로, 체념을 미덕으로 변형시켰다.

아직까진 극소수의 사례로만 존재하지만 현대인은 다른 시각을 가진다.
그에게 있어 물질 세계는 감사하며 받아들이거나 신앙으로 간청하며 받아들여야 할 자료가 아니라 그의 과학적 조작의 재료일 뿐이다. 사막은 물을 끌어들여야 할 곳이고 말라리아 발원지인 습지는 물을 빼내야 할 곳이다. 어느 것 하나도 인간에 대한 자연적 적의를 유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며, 따라서 물질적 자연과의 투쟁에 있어 우리는 사탄을 막아주는 하나님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가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인간 본성에 있어서도 이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개인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성격을 바꾸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과학적 심리학자는, 만일 아이들을 마음대로 다뤄도 좋다고만 한다면,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사막을 다루듯 자유롭게 인간 본성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러니 죄악을 만드는 것도, 이제 사탄이 아니라 좋지 못한 분비선과 현명하지 못한 여건 제공이다.

37. 진리가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중대한 지적 진보란 것은 무릇 외부의 견해로부터 일정 정도 자유로울 때 가능한 법인데, 정통주의자들이 신의 의지에 바치는 것과도 같은 종교적 존경심을 가지고 다수의 의지를 다루는 곳에서는 그러한 독립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지를 존경하는 것은 신의 의지를 존경하는 것보다 더 해롭다. 왜냐하면 다수의 의지는 규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 더번 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구 평지설 협회’의 한 회원이 세상을 향해 공개 토론을 신청했다. 한 선장이 이 도전에 응했는데 세상이 둥글다는 그의 유일한 논거는 자기가 지구를 돌아봤다는 것이다.

물론 이 논쟁은 쉽게 결말지어졌으며, 그 협회의 선전가가 3분의 2에 해당하는 다수표를 차지했다. 인민의 목소리가 이와 같이 선포되었으므로, 그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더번에서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후로는, 지구가 둥글다는 얘기는 공산주의와 가정의 파괴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악마적 독단이라는 그 선언에 찬성하지 않는 한 누구도 더번(이 시에는 대학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내 공립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었을 걸로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다.

38. 도덕의 종교 의존성은 낮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는 기독교를 추방하면서 개탄할만한 일들을 저질렀다. 히틀러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한 기독교 배척은 적어도 우리의 고민의 부분적인 원인이며 따라서 세계가 기독교 신앙으로 되돌아가면 우리 국제사회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나는 이것을 공포에서 생겨난 철저한 망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위험스러운 망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훌륭하게 열매맺을 수 있는 사고를 갖춘 사람들을 오도하여, 터무니없는 해결책을 취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비단 현상태의 세계에만 관계된 것은 아니다. 훨씬 더 보편적인 문제로서 여러 세기를 두고 논란이 되어온 문제이다. 이것은, 만일 사회가 독단적인 종교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과연 적으나마 충분한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도덕의 종교 의존성이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높다고 보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대단히 중요한 덕목들은 종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속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고까지 생각한다.

39. 범죄는 성경이 아니더라도 제재할 수 있다
설사 경찰이 실패한다 해도 하나님이 계시니 도둑을 벌해줄 것이라는 얘기를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 믿음만으로도 정직성이 높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도둑질을 금하셨음을 기꺼이 믿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의 종교의 유용성은, 도둑이 왕인데 그 왕이 지상의 정의 위에 군림한다는 내용의 나보드의 포도원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과거의 반문명화된 사회들에서는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품행을 증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도덕의 기원을 종교로 돌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너무도 심각한 악폐들과 단단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이 악폐와 비교하면 이익이 무의미해질 정도다.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세속적 강제력은 보다 확고해지고 하나님의 강제력은 보다 줄어든다.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면 붙잡힌다고 생각할 근거는 더욱 많아지고, 붙잡히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처벌하실 거라고 생각할 근거는 점점 더 줄어든다. 오늘날에는 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조차도, 도둑질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믿는 경우가 거의 없다. 때맞춰 참회하면 된다고, 어쨌거나 지옥이란 것은 그다지 확실하지도 않을뿐더러 옛날처럼 그렇게 뜨거운 곳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사람들은 대부분 도둑질을 하지 않는데 아마도 당장 여기 지상에서 처벌될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40.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기독교 호교론자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공산주의를 기독교와는 크게 다른 것으로 보면서 공산주의의 해악을 기독교 국민들이 누리고 있다는 축복과 대비시킨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공산주의의 해악들은 ‘신앙의 시대’ 기간 동안 기독교 내에 존재했던 해악들과 똑같다. 게페우가 종교재판소와 다른 점은 양적인 측면뿐이다. 게페우의 잔학행위들, 그것이 소련의 지적 도덕적 생명에 주는 피해는 과거 종교재판가들이 득세할 때마다 저질렀던 것들과 똑같은 류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역사를 날조하는데 교회도 르네상스 이전까지 똑같은 짓을 했다.

지금은 교회가 소비에트 정부만큼 나쁘진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교회를 공격했던 사람들의 힘 덕분이다. 트랜트 공의회(1545∼63년 사이에 열린 로마 가톨릭 교회 회의)서부터 오늘날까지 교회가 혹시라도 나아진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교회의 적들 덕이었다. 공산주의의 경제원리가 싫어서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크렘린의 이 원리는 초기 기독교인들, 프란체스코 수도회, 중세 기독교 이단자들의 다수가 지지했던 원리이기도 하다.

41. 기독교 역사의 해악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가 좋다는 사람
내가 볼 때 버터필드의 주장은, 불필요한 것들을 빼고 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자기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면 좋을 것이지만 사람들은 별로 그런 의향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이었음을 믿는다면 믿지 않았을 때보다 이 부분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이었음을 설득시키려 애쓰기 마련이다.’

이런 류의 주장에 대해선 반박론이 워낙 많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우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버터필드 교수 및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믿고 있는데, 그들이 이런 견해를 갖게 된 이유 그 자체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그들이 이 견해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의 신성의 증거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신학에 근거한 윤리가 아니라 자기들의 윤리에 근거한 신학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는, 자신들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 비신학적 근거들이 폭넓은 호소력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이 보기에 좀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다른 주장들을 창안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진전이다.
한때 많은 신교도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살인하는 것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나쁘지 않다고 설득한다면 그들은 그렇다면 살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추론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모든 종교의 윤리는 일부 합리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것들과 미신적인 금기들의 구현에 지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다. 합리적으로 변호될 수 있는 부분들은 지켜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다른 부분의 비합리성을 발견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부분까지 몽땅 성급하게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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